“나는 들러리가 아니라고요!”
내 마음을 조금도 모르는 아빠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하려는 오빠
그사이에서 난……?
이제 달라질 거야!
난 아빠와 오빠의 들러리가 아니라고요!
《아빠는 내 맘을 몰라》는 세계적인 어린이 책 작가인 앤서니 브라운이 그리고, 영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 가운데 하나인 휘트브래드 상을 수상한 재니 호커가 쓴 동화이다. 앤서니 브라운 특유의 치밀하면서도 은유적인 그림과 상상력 풍부한 재니 호커의 섬세한 문장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읽는 이의 시선을 쉼 없이 사로잡는다.
이 작품은 액자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빠와 오빠 사이에서 들러리처럼 자라던 십대 소녀 리즈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휘파람조차 불 수 없던 시대에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해 과감히 남자 행세를 했던 샐리의 이야기가 비밀의 정원을 매개로 교차되어 펼쳐진다.
이 작품은 두 개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 안에서 누군가의 ‘들러리’ 혹은 ‘덤’이 아니라 온전한 주인공으로서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아이들의 욕망을 자극한다. 가족 또는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런 줄 모른 채 부질없는 회의와 절망에 빠져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진짜 나’를 만나는 시간
사랑받고 있으면서도 사랑받고 있는 줄 모르는 아이들이 흔히 ‘내가 여자아이라서?’ ‘내가 둘째라서?’ 등 갖가지 이유를 떠올리며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듯, 리즈도 자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뵈는 아빠와 오빠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에 빠지게 된다. 어릴 때 엄마를 잃고 아빠와 오빠 사이에서 자라난 탓에 생활이 온통 남자들 중심으로만 굴러가기 때문이다. 리즈는 그 안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정쩡한 자세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기만 할 뿐,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소리 내어 말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늘 들러리처럼 한편에 서서 아빠와 오빠의 구경꾼으로만 지내온 리즈. 더 이상은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리즈는 가족의 주말여행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샐리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통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 해도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고 사는 것보다는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갈 때가 훨씬 더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은 다른 사람이 원하는 내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나로 살아갈 때가 가장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샐리는 샐리와 만나고 난 뒤,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아빠와 오빠 사이에서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 어린이들도 리즈와 샐리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자신이 원하는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기회를 맞게 되기를 기대한다.
장난이었다고?
리즈는 너무 화가 나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자신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은 상인 소중한 스케치북에 낙서를 한 오빠와 그걸 보고 오빠를 혼내기는커녕 껄껄 웃어 버린 아빠 때문에. 리즈는 캠프장을 벗어나 큰길까지 무작정 달렸다.
리즈는 불꽃이 튀듯 쓰라린 눈을 두 손으로 비볐다. 하지만 너무너무 화가 나서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선뜻한 저녁 바람이 나무들 사이로 소리 없이 일렁였다. 머리 위에서는 나뭇잎들이 바람결에 부드럽게 나풀거렸다. 리즈는 조그만 스케치북을 천천히 펼쳤다. 그러자 메코프 선생님이 속표지에다 검은색 펜으로 예쁘게 써 놓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미술 시간에 멋진 작품을 선보인 엘리자베스 잭슨에게 이 스케치북을 상으로 수여함.
그런데 그 스케치북 첫 장에 앨런이 여자의 알몸을 조잡하기 짝이 없게 그려 놓았다. 머리도 팔다리도 없이, 빨간색 펜으로 몸뚱이만 대충 그려 놓고는 그 밑에다 ‘앨런 미켈란젤로 잭슨이 그린 누드화’라고 휘갈겨 써 놓았다! 앨런은 리즈의 오빠였다.
난생처음 받은 상을 앨런이 망가뜨린 채로 두고 싶지 않았다. 스케치북은 이제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리즈는 스케치북이 이미 망가져 버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이든 그리지 않는다면 다시는 여기에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될지도 몰랐다. 스케치북은 영영 망가진 채로 남아 있겠지. 남의 스케치북에다 함부로 낙서를 한 앨런 오빠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보고 껄껄 웃고만 있었던 아빠 때문에.
리즈는 뒷주머니에서 연필을 꺼냈다. 그리고 신경질적이리만치 빠른 손놀림으로 달리는 사람 하나를 그렸다.
할머니가 남자였다고요?
리즈가 그림을 그리면서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을 무렵 낯선 할머니와 마주친다. 자신의 이름을 샐리 벡이라 밝힌 할머니는 리즈에게 자신이 한때 남자였다는 이상한 말을 한다. 그러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으면 칼튼 홀 정원으로 찾아오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진다.
“요즘 아이들은 어떻게 사누?”
샐리 벡 할머니가 리즈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리즈는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해서 말끝을 흐렸다.
“저는 너무 평범해서 딱히…….”
샐리 벡 할머니는 말없이 웃으며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할머니가 걸을 때마다 외투가 장화를 스치며 휙휙 소리를 냈다. 마치 할머니의 웃음소리처럼 들렸다.
“다만…….”
리즈는 양쪽으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의 끝을 입에 물고 씹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따금은 남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샐리 벡 할머니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러자 달도 할머니 어깨 뒤에서 멈추었다. 푸른빛이 감돌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한 보름달은 아니었다.
“요즘도 그런 생각을 하는 여자아이가 있구나? 그것참, 재미있는걸. 사실 나는 한때 남자였단다. 그래, 한때 그랬지.”
“할머니가 남자였다고요?”
리즈가 샐리 벡 할머니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